2014.06.02
벗는 짐, 지는 짐 (2000. 12. 3 주일설교)

벗는 짐, 지는 짐


오늘의말씀/ 마11: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현대는 스트레스의 사회입니다. 스트레스는 한국말로 짐이라고 번역하면 좋습니다. 현대인들은 짐을 너무 많이 지고 삽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과중하게 받으면서 산다는 말이지요.

미국에서 스트레스 지수를 조사한 걸 봤습니다. 청소년 젊은이들의 경우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열 가지는 대략 이러합니다. 결혼(100) 미혼임신(92) 부모죽음(82) 불구 될 때(81) 부모이혼(77) 남자 외도 임신(77) 알콜마약중독(76) 부모의 입건(75) 부모별거(69) 형제자매죽음(68) 이랍니다. 성인의 경우는 또 조금 다릅니다. 배우자죽음(100) 이혼(73) 별거(65) 투옥(63) 가족죽음(63) 부상,병(53) 결혼(50) 일에 탈진(47) 결혼 재화합(45) 은퇴(45) 가족건강에 변화(44) 임신(40) 이렇습니다. 그 밖에도 짐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현대들인들은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우리 주님은 스트레스를 대신 져주신다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율법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생의 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짐이든 인간이 고단하게 지고 가는 짐입니다.

제가 노동상담을 하다보니, 직업병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최근에 직업병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일어납니다. 뇌출혈 및 심장계통의 이상은 전부 과로나 스트레스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견디는 능력에 따라 병이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문제는 과부하입니다. 자신이 견딜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왜 견디지 못하도록 미련스럽게 일을 하느냐 이렇게 나무랄 수 있지만 막상 닥치고 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경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만큼은 바꿀 수 있다 이겁니다. 마음만 바꿔도 번개불에 라면을 삶아 먹을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왕 바꿀 수 없는 환경이라면 이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나의 위치가 전부인 줄 압니다. 내 지금의 역할이 바로 나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입니다. 역할은 나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가 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노조 간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할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역할이 끝날 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역할이 내 존재 자체처럼 됩니다. 이 역할이 아니면 인생이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습니다. 좀 객관화 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역할을 맡고 있구나 이렇게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한국말 중에 ‘너죽고 나죽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인이 변심하면 끝까지 쫒아갑니다. 그리고 칼부림을 하고 너죽고 나죽자 식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고 못된 짓을 하면,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하며 너죽고 나죽자며 달려듭니다. 이혼을 하게 되어도 너죽고 나 죽자입니다. 죽일려는 상대편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입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죽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 상대방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최후의 순간에도 나는 나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현실로 당하면 어렵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로 오너라”했습니다.(28절) 비신앙인이든 신앙인이든 우리 주님의 이 말씀에 좀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현실적인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찌들린 너와 나의 모습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걸 보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짐을 지고도 가볍게 가면 문제가 없겠지요. 너무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과부하입니다.

한번 보십시다. 짐의 종류와 짐의 모양이 다를 뿐이지, 창세기 이래로 인간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지 않는 시대가 있었습니까? 짐 중에도 가장 큰 짐은 존재의 짐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짐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자체가 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에덴동산의 바깥 생활 자체가 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삶은 살아가는 것 그 자제가 짐입니다. 사는 것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풀과 엉컹퀴를 내리라”(창3:18)

에덴 동산을 떠난 인간은 죄와 죽음과 심판의 처절한 운명을 안고 갑니다. 인간이란 자체가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살아가는 존재의 짐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바위를 계속 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위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바위입니다.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사람들은 이런 기본 짐에다 자신의 짐을 덤으로 더 얹어 놓습니다.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짐의 무게를 더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기본적인 짐을 해결하면 짐은 훨씬 가벼워집니다.

이제 짐을 내려놓으세요. 우리 주님이 져주십니다. 이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세요. 우리 주님이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때로 좀 쉬어 보세요. 그러기에 때로는 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쉼표와 느낌표가 많아야 삶의 질이 높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하고, 쉬지 않고 고민하고, 쉬지 않고 짐을 지고 서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교회 좀 나오세요’ 그러면 ‘바빠서요’ 그럽니다. 얼마나 바쁘면 쉬자는 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주일에 꼭 쉽니다. 거룩하게 쉬니까 얼마나 잘 쉬는 거예요. 영혼이 안식을 하니 잘 쉬는 겁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주일을 통해 쉴 뿐 아니라 재충전도 합니다. 한 주일을 돌아보고 또 한 주일을 준비하는 겁니다. 확실한 재충전(Recreation)을 합니다. 예배는 우리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요. 주일 예배가 확실하면 한 주일의 삶의 초점도 분명해 질 겁니다. 이게 거룩한 안식이예요.

휴일에 종일토록 TV만 보고 지내보세요. 더 피곤합니다. 쉴 때는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때문에 휴일에는 가사 일에서도 좀 해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재충전은 몸이 재충전 되어야 합니다. 더 확실한 재충전은 영혼이 재충전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흐려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면 재충전이 안된 것입니다. 때문에 주일에는 몸의 휴식과 마음의 휴식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 지키는 문제가 나왔으니 말이지, 안식일의 근본적인 정신은 쉼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몸과 영혼의 철저한 안식을 위해 그 많은 조항을 만든 것입니다. 미쉬나라는 유대교 경전에 보면 안식일에 관한 율법 조항이 가장 많이 발달해 있습니다. 왜 그많은 까다로운 조항을 장치해 놓았느냐? 다 제대로 쉬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몸도 그토록 철저하게 쉬고 영혼도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요즈음 크리스챤들은 몸도 못쉬고 영혼도 못쉽니다. 주일에 돈을 무조건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은 정당합니다. 가령 주일에 고아원 봉사를 가려고 버스를 타는데 돈을 쓰지 말아야 합니까? 그건 돈을 써야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너무 자유주의적인 자세도 문제요, 정신을 잃어버린 너무 율법적인 자세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쉼과 사랑의 원칙에 따라 복음적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기쁨과 사랑의 원칙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칠일에는 거룩하게 영혼의 안식을 취하며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짐을 벗는 행위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과 쉼의 리듬이 중요합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쉼은 더 중요합니다. 엿새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거룩한 안식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은 분주한 그대를 향해 쉼의 초청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 안에서의 거룩한 안식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는 정말 거룩한 쉼을 쉬고 있는가? 자문해 볼일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자녀 된 우리가 아직도 이 주님의 쉼의 초청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군들이 군 트럭 짐칸에 사람들을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한참 가다 뒤를 돌아보니 차 뒤 짐칸에 탄 한국인들이 모두다 여전히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미군은 차를 세우고 "왜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힘들게 머리에 이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하길 "차에 태워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짐을 다 그대로 지고 있으면 믿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다 쌓으면서 산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짐을 벗겨 주시는 주님에게 몸을 맡기세요, 우리의 짐을 져주십니다. 이제는 짐을 내려놓고 안식할 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다 져주신다고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쉼을 얻은 우리는 또 기억해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짐을 져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짐을 내려놓게 하고 쉼을 주고 복을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라면 미신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그 다음은 기쁨으로 지는 하나님 나라의 짐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짐입니다. 신앙은 짐을 벗으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짐을 벗고 동시에 주님의 짐을 집니다. 섬김, 베품, 나눔, 희생, 고난, 좁은 길, 이건 전부 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걸 짐으로 여기지 않아요. 기쁨으로 합니다. 취미 생활처럼 앤돌핀이 나오는 짐이예요. 운동처럼 즐겁고 좋아요. 자발적인 짐입니다. 감격적인 짐이예요. 보세요, 전부 마음이 문젭니다. 똑같은 곳에 놀러가도 기분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사람과 가면 짐이 되고 즐거운 사람과 가면 놀이가 됩니다. 등산, 수영, 조깅도 즐거움으로 하면 운동이지만, 강제로 하면 노동이 됩니다. 새벽기도도 즐거움으로 하면 기쁨의 기도지만 강제로 하면 노동이 됩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는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노동이 아니고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안식을 얻은 후의 짐은 가볍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 이는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지기 쉽다”(29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주신 짐은 지기 쉽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진 짐이 더 무겁습니까? 더 어려운 짐입니까? 제대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짐 자체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게운 짐도 쉽고 가볍게 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듣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생도 낙이요, 기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 빨리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쉬라고 하시면 쉬겠습니다.’이런 고백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짐을 져야 합니다. 주님의 짐은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짐입니다. 인간으로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믿고 났더니 온갖 거추장스러운 것이 다 따라 붙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걸리는 것이 많고 양심에 찔리는 것이 많고 도통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짐입니다. 더 나아가면 고난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 짐은 가볍습니다. 이 짐은 지기가 쉽습니다. 이 짐은 지고 나면 보람이 있습니다. 이 짐은 영생의 짐입니다. 이 짐은 기쁨의 짐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러 십자가에 매달리는 짐을 졌습니다. 도마는 톱에 썰려죽는 짐을 졌습니다. 데미안은 몰라카즈 섬에서 일평생 나환자를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서 일평생 부랑자와 빈민들을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너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난도 눈물이요, 어려움도 기쁨입니다. 더 깊은 섬김을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짐을 가볍게 지는 교우들을 볼 때면 아름답습니다. 아마 교회 주방의 벽지를 공사하라고 명령 받고서, 먹고 살기 위해 주방 벽지 공사를 했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교회 페인트칠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꽃을 주일마다 준비하라는 걸 의무로 알고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런데 전부 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몰래하는 기쁨을 가지고 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벼운 짐입니다. 이것이 지기 쉽다는 말입니다.보세요, 일의 내용은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더 무거울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 중심에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과 나 만의 일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헌신입니다. 주님과 나 와의 기쁨입니다. 한 번도 이런 경험 못하신 분들이 있지요?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면서 기뻐지는 경험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기분입니다.

모나미 153(Mon Ami 153)볼펜 이야기 잘 아시지요? 모나미 볼펜을 자세히 보면 ‘모나미 153’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모나미 회사 사장님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에는 절망에 빠지고 교회도 게을리 했다고 합니다. 짐이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그때 요한 복음이 생각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절망에 빠진 고기잡이 전문가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습니다. 요한 복음 21장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인 제자 요한이 몇 마리인지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목격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의 친구 되시는 예수님 153 마리 고기를 잡아 주신 걸 기억해서, 사업의 짐이 무거울 때, 사업이 절망에 빠질 때, 주님을 모시고 경영을 하면서 풍성한 결실을 얻고, 또 그 풍성한 사업의 결실을 예수님의 정신대로 사용하자는 결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짐은 나의 수고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신 분들은, 우리 주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짐을 기쁨으로 지시는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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