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2
이름 없이 (2000. 12. 17 주일예배)



이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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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레2:11-13

"(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 "레2:11-13



현대는 자기 P.R 의 시대입니다. 자기를 홍보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누구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누구도 물건을 구매해 주지 않습니다. 텔레비젼 광고는 무엇입니까? 노골적인 광고는 물건 홍보를 하고, 고상한 광고는 이미지를 홍보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모두 자기를 기를 쓰고 홍보하고 선전한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홍보와 선전의 사회에서 숨은 행동을 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선행과 봉사, 사랑의 실천에서 이름을 내지 않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번 보도를 보니까 한달에 100만원씩 동사무소에 대리인을 시켜서 돈을 전달하는 얼굴 없는 선행자의 이야기가 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그리 부자도 아니랍니다. 아주 어렵게 자라 사업을 해서 지금은 먹고 살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옛날 고생할 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얼굴없이 꾸준히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약속에 충실한 것입니다.

저도 구미에서 사랑의 전화를 할 때에 수 백만원을 내어놓고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사람의 기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름을 내는 것은 전부 타락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할 때 마귀가 유혹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이 밝아 자기의 이름을 독자적으로 드날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이름이 빛이 가려 손해만 보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 지고 자신의 독자적인 이름을 가진 결과는 타락으로 인한 에덴의 추방입니다. 바벨탑 사건도 보면 그렇습니다. ‘대를 쌓아 우리의 이름을 내자!’ 이것이 바벨탑 건설의 슬로건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최초의 의도는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결과는 온 지면에 흩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도 그랬습니다. 마귀가 유혹 한 것은 이름을 드날리라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천사들이 받들게 해 명예를 드날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소제라는 제사의 규정도 바로 이런 정신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입니다. 감사제의 성격이 있지요. 때문에 소제는 의무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철저한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 소제의 원칙은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또 꿀을 발라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부풀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것도 한 것 보다 더 부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풀려서는 안됩니다. 선생을 해놓고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과대 포장입니다. 꿀은 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있는 것 보다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꿀은 선전이요, 홍보입니다. 그래서 과대포장과 선전과 홍보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금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면 무명의 원칙을 가르친 것 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금과 구제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선행을 하고 그것이 알려지면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마6:1-2)

때문에 성경은 구제할 때에 은밀히 하라고 명령합니다. 얼마나 은밀히 하느냐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하겠습니까? 즉 선행을 하고 나서는 무의식에서도 그 선행의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것입니다. 구제의 원칙은 '은밀히'가 생명입니다.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얼굴없이, 무명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마6:3-4)


교회에서 봉사를 좀 했는데 목사님이 왜 칭찬을 안해 주시는거야. 이런 기대 하지 마세요. 하늘의 상을 제가 박탈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지체에게는 격려하기 위해 칭찬할 것입니다 칭찬을 받으면 '아, 내가 아직도 어려서 이렇게 심한 배려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헌금과 선행은 바야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앞에만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눈만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숭고한 신앙의 실천을 위해서 우리 교회는 이번 성탄절을 기점으로 무명헌금을 실행하려 합니다. 여러가지 불유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좀 과도한 측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행을 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을 좀더 순수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을 돌려 주님께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교회의 헌금의 삼원칙을 천명하려고 합니다. 그 삼원칙은 바로 감격, 자원, 무명입니다.
첫째 원칙인 감격은 무엇입니까? 은총에 감격하는 마음입니다. 기쁨의 원칙입니다.
둘째 원칙은 자원(自願)입니다. 스스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억지로나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헌금은 미리 정해서해야 합니다. 준비해서 해야 합니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 (고후9:7)

셋째 원칙은 무명입니다.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책임지고. 하나님의 눈만 의식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기쁨이요, 절대 헌신의 행위가 바로 헌금의 행위입니다. 헌금은 정말 특 권중의 가장 위대한 특권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의 행위입니다. 누구도 그 장엄한 의식을 침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누구도 그 거룩한 의식을 간섭하거나 옅볼 수 없습니다. 목사도 안되고 재정 집사도 안됩니다. 누구도 그 위대한 의식을 강요하거나 강압할 수 없습니다.

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의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실 일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의식을 전락시키지 마십시오.

그리고 헌금은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으로 두 분류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정 ,감사, 절기, 작정 다 안해도 좋습니다. 다만, 십일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하는 것이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까닭에 기도하십시다. 저는 지금 헌금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게 해 주세요. 저는 지금 헌금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헌금은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강조는 꼭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의 비뚤어진 현상은, 헌금 정신의 진정한 강조는 다 빠져 있고 강요만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헌금의 메마른 강요는 정신을 말살시키고 영혼을 말살시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의 통로가 될 뿐입니다.

저는 지난 12년 동안 구미에서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훈련에 대한 직무유기를 한 것에 대한 회개를 하고 이제는 강요가 아닌 바른 헌금 원칙에 대한 강조를 힘있게 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한국 교회가 바르게 헌금하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은 바르게 헌금하지도 않고 더구나 비극적인 일은 교회가 바르게 사용하지도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 전체의 예산의 10%만 사회에 환원해도 보건복지부 예산을 넘는다고 합니다. 10%는커녕 2-3%정도로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으니 바르게 내는 훈련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거꾸로 너무 과도하게 사회를 향해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력갱생의 원칙을 강조할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는 헌금의 쓰임에 대한 방향은 참 좋습니다. 이제는 바른 헌금만 하면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산의 50%를 사회를 향해 조건없이 낭비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교회 이전의 짐을 다 벗고 나면 즉각 시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은 무엇보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것도 다 그렇지만, 특별히 헌금은 더 그렇습니다. 헌금은 결과 보다 동기입니다. 어떤 동기로 드리느냐, 어떤 마음의 자세로 드리느냐, 어떤 신앙고백으로 드리느냐 이것이 헌금의 생명을 결정한다 이겁니다. 바리세인은 금화로 수 천만원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금 동기가 불순하고 헌금의 자세가 올바르지 않기에 주님은 그를 책망하고 그의 헌금을 가치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두 렙돈, 즉 십원짜리 두 개를 아주 기쁘게 받았습니다. 렙돈은 유대 화폐의 가장 적은 단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헌금이 누구의 것 보다 가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헌금을 한 수 많은 사람보다 많다고 합니다.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막12:42-43)

십일조는 소속의 표시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런 고백의 표시입니다. 로마에서는 속주에게 10%의 세금을 물린다고 했습니다. 가장 관대한 세금입니다.

또 십일조는 종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농부가 급하다고 종자를 다 까먹지는 않습니다. 한 해 농사중 제일 좋은 것으로 미리 마련해 둡니다. 때문에 헌금이 시험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봉사가 시험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사랑의 실천이 시험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헌금은 성숙의 도구 기쁨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여러분이 신앙인 다운 신앙인이 되기 위해, 주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좀더 순수해 지도록 합시다! 그것이 교회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했습니다.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눈보다 결국 인간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출발은 하나님의 눈인데 하다가 보니 인간의 눈을 더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의 눈만 의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다 성자라고 칭찬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문제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고 한 것이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만 책임지십시오. 인간을 보지 마십시오. 인간의 눈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만 보상받으십시오. 인간의 보상을 거절하십시오. 인간의 칭찬을 물리치십시오. 인간의 영광을 멀리하십시오.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해 준 그 영광만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의 칭찬을 추구하십시오. 모세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순수한 신앙으로 헌금하고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위대한 신앙의 승리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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