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2
신선한 기대감 (2000. 12. 24 교회이전예배)

신선한 기대감


오늘의 말씀/막9:14-27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



어린아이들은 소풍을 갈 때면 잠을 잘 못잡니다. 4시에도 일어나고 5시에도 일어납니다. 밤새 뒤척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봅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는지. 비는 오지 않는지.. 이렇게 설레는 게 바로 소풍날입니다. 김밥이 쉬어 터져도,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도 마냥 설레고 기분 좋은 것이 소풍날입니다.그런데 커 갈수록 설렘과 기대가 적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설렘과 기대감을 많이 안고 사는 사람이 인생을 젊게 사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감도 없고, 아무런 설렘도 없다, 이거 죽은 인간입니다. 무덤에 갈 날만 남은 거지요.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계시록의 말씀과 같습니다. 요즈음 현대인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가 참 많습니다.

왜 사는지, 인생에 대한 기대감도, 하루에 대한 설렘도, 만남에 대한 신선한 충격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어졌으니 살고, 그저 닥치니까 일하고, 어쩔 수 없이 만나고 그럽니다.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입니다. 아무리 이팔청춘이라도 설렘과 기대감이 없는 생활은 팔십 노인입니다. 백살을 살아도 아직 기대감과 설렘이 있다면 이팔청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왜요? 죽는 순간에도 하늘 나라의 소망으로 설레고 기대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기대감과 소망으로 활기 넘쳐야할 크리스챤들이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에 대해 기대감이 없어요. 하나님이 일으키실 사건에 대해 기대감이 없어요. 하나님이 베푸실 내 인생의 잔치에 대해 기대감이 없어요. 하나님이 설계해 놓으신 내 인생의 설계에 대해 기대감이 없어요.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도전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벙어리에다 악령까지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 아들은 벙어리에다 간질병까지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으니, 아마 십 수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보지 않았겠어요? 용하다는데는 다 가보지 않았겠어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갖은 노력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었습니다. 이제는 체념할 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정은 참으로 끈질긴 것입니다.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친다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체념했던 마음이 다시 물결치기 시작합니다. 한번만 더 해 보자. 이번에는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 몰라! 너무 용하다는 분이니까, 밑지는 셈치고 한 번은 해 봐야지. 이런 마음으로 발작하는 병든 아들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병든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정작 예수 선생이 없습니다. 선생은 외출 중이고 제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요한,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선생은 언제 내려오실지 모르고, 능력있는 분의 제자이니까 이 제자들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귀신은 나가지 않고 병은 고쳐지질 않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 되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물고 늘어졌습니다. 병을 고친다더니 왜 못 고치느냐? 귀신을 내어 쫒는 권한을 어디서 부여받았느냐?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아니냐? 등등 이런 말로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일대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등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말합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절)

이 말이 오늘 대화의 중심 주제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22절, 공동번역)

두 번역 다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문장 안에는 만약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만약이라는 말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If you can do anything (RSV)). 헬라어 원어에도 보면 가정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έί τι δύνη) 여기서 핵심 단어는 ‘만약’입니다. έί라는 헬라어입니다. 영어로는 If입니다. 이 만약이라는 단어가 이 아버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왕 아이까지 데리고 온 마당에 만약이라고 까지 이야기 한 것은 너무 했지 않습니까? 이 아버지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에게 한 번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인들 별 신통한 것이 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한번 실망한 사람, 다시 기대감을 갖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교회 처음 나왔다가 실망한 사람들은 다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다 그래! 교회는 다 돈을 밝혀! 광신자가 되면 안 돼! 꼴불견이야! 한 번 실망한 사람들, 다시 마음을 주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다 돈을 밝히는 것도 아닙니다. 제대로 된 광신자들은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처음 실망,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 과거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못 고쳤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22절을 어떤 성경에서는 재미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뭔가가 있다면..” (If there is anything you can do(Gspd))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디 한 번 보따리를 풀러내 보슈!’ 이런 뉘앙스입니다. 고칠 수도 있고 못 고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 주십시오. 이런 분위기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병자들의 유형이 6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6단계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지어 봤습니다.
1. 당신은 절대 못 고쳐!(절대 부정형)
2. 어디 고치나 두고 보자!(비판적 방관자형)
3. 혹시 고칠지도 모르지!(반신반의형)
4. 잘 하면 고칠 수 있을 거야!(요행적 기대형)
5. 고칠 수 있습니다.(확신형)
6. 무슨 일이 있어도 고칩니다.(절대적 믿음형)

설교도 그렇습니다.
1. 아무리 설교해도 말뿐이야!(절대부정형)
2. 어디 오늘 설교는 잘 하나 보자(비판적 방관자형)
3. 오늘은 설교 말씀이 좋을까?(반신반의형)
4. 오늘은 잘하면 은혜의 말씀이 될꺼야(요행적기대형)
5. 오늘 말씀은 반드시 은혜가 넘칠거야(확신형)
이렇게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이 아버지는, ‘반신반의형’과 ‘요행적 기대형’ 사이 정도 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느 유형에 속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요행적 기대형을 꾸짖은 것입니다. 믿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없었으면 병든 아이를 끌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요. 믿음이 있긴 있었지만 기대와 열정이 넘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긴 있었지만, 확신이 찬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도 이렇습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 기대감이 없습니다. 요행적 기대형은 기대감이 있기는 있지만, 빛바랜 기대감입니다.

요즈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이런 회색분자들이 많습니다. 신선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시간을 투자해서 예배에 왔지만 정작 신선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예배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계시는 무엇일까? 오늘 예배는 또 어떤 은혜가 쏟아 부어질까? 이런 신선한 기대감으로 온 예배자는, 눈동자가 다르고 태도가 다릅니다.

성악가 김자경씨가 있습니다. 1968년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설하고 왕성하게 활동한 원로 성악가 입니다. 김자경씨는 지난해 81살의 고령임에도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령임에도 독창회를 매년 갖습니다. 그녀는 독창회 무대에 나설 때는 늘 빨간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무대에 나갈 때면 뛰어서 나간다고 합니다. 정열의 상징인 빨간 옷을 입고 무대를 새색시처럼 설레는 가슴으로 뛰어 나갑니다. 무대에 대한 정열이 살아 있습니다.신혼 새댁처럼 관객이 있는 무대가 설레고 흥분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서는 무대이지만, 늘 새색시처럼 기대감이 넘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대를 뛰어서 나가는 겁니다.

저는 이 사실을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매 주일 강단에 서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없을까? 심지어 노래하는 가수가 무대에 설 때도 저런데, 하나님의 말씀 잔치를 주도하는 내가 이런 설렘과 기대감이 없어서 될까?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솔직히 목사는 주일예배가 부담입니다. 설교가 부담이고, 주일 예배 때 빠진 교우가 부담이고, 주일 행사가 부담이고, 모든 것이 부담입니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병이 걸립니다. 신경이 예민해 지고, 혈압이 높아집니다. 주일 아침에 이 부담은 최상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반성을 했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뛰어서 나가자고. 강단에 설 때도 뛰어서 나가자고. 그런 기대감, 그런 설렘으로 나가자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설렘과 기대감이 없는 병자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꾸짖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하시니”(23절)

믿음을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기대감이 형편없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기대감이 사라진 그대의 믿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관성과 습관에 묻혀 버린 그대의 메마른 믿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의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이왕 아이를 끌고 예수님 앞에 왔으니 신선한 기대감을 가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왕 왔는데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이왕 왔으니까 이왕 주어졌으니까 기대감을 가지세요. 이왕 예배 드리러 왔으니, 이왕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니, 이왕 살아야 될 부부관계이니 멋있게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 보자고요! 이왕 주어진 시간이니, 이왕 닥칠 2001년이니,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들 기대감과 몰입이 없습니다. 그저 중간 지대에 있어요. 자기가 관련된 문제인데도 그저 중간 지대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기대하는 자에게 새 것이 옵니다. 기대하는 자에게 기적은 베풀어집니다. 믿음은 늘 신선하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해 늘 신선한 기대를 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이 실행하시는 프로젝트는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 이 고통을 통해서 짜려고 하는 주님의 옷감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 제 인생의 과거를 동원하여 만들려는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기대감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죽을 때도 그렇습니다. 개 끌듯이 끌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맛볼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기대에 차서 천국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믿음의 길은 지뢰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신앙의 길은 무슨 사고투성이 저주의 길이 아닙니다. 또 무슨 사고가 터질까? 이런 불안한 지뢰밭이 아닙니다. 소풍길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리스도인에게 저주의 근거는 없습니다. 전부 기대감입니다. 낡고 진부한 기대감이 아닙니다. 늘 신선한 기대감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고 여기 까지 오신 여러분, 이렇게 기대를 해 보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 주님이 새로 주실 2001년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주님이 주실 축복은 또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저를 통해 이루실 사역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의 하루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하실까요?

주님, 주님은 또 오늘 또 무슨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까?
오늘은 또 어떻게 나를 사용하실것입니까?
내년에는 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내릴 축복은 또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에 내릴 주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 어떤 은총을 부어주실 것입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십니까?
오늘 일터에 가면 또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입니까?

이렇게 여러분 인생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으킬 사건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세요. 아니 주님 그분 자체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세요. 기대감이 넘치면 기적이 넘칩니다. 이런 활기찬 기대감으로 주님의 기적을 맛보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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