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2
변화의 기회 (2000. 12. 31 주일예배)

변화의 기회


오늘의 말씀/롬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미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양 도둑이 있었는데 양을 훔쳐간 사람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이라는 글자 S.T.(Sheep Thief)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일생동안 다른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너무도 잔혹한 이교도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양 도둑질을 해서 이마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면서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서 다 도와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대신 매맞아 주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있으면 대신 처해 주고 슬픈 사람 옆에 사흘이라도 같이 있어줍니다. 그래서 그 동네와 이웃 마을에서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 맛이 없어질 정도로 그는 동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보다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게 되자 양 도둑질을 하던 때 그에게 낙인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의 2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장수를 합니다. 2세들이 자라서 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입학식 때에는 으례히 훈사를 하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은 없어졌습니다. 어떤 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마에 어째서 S.T.가 붙었느냐고 묻습니다. 양 도둑의 약자와 성자(Saint)라는 말의 약자는 같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그 분이 거룩해서 성자되는 낙인을 찍었다고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양 도둑놈이 성자가 된 것입니다. 이 정도로 변해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치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말년에 완전히 변해 버린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도 채 열 세 시간이 안남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해에는 도둑에서 성자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해답과 그 도전을 바울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도전의 말씀은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거룩이란 단어는 구별이라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세속적인 것, 어둠의 요소에서 정화되고 구별된 것,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속의 것을 막 뒤섞으면 거룩이 아닙니다. 물량주의 방식, 효율적인 방식, 으뜸주의 방식, 약육강식의 방식, 이것 다 세속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런 세속의 방식이 교회 안에서도 판을 칩니다. 그러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성경책을 끼고 있더라도, 비록 찬송을 부르고 있더라도, 비록 십자가를 세운 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까닭에 거룩은 먼저 세속의 방식을 개혁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정착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활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도 했습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합당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바른 예배, 진짜 예배라는 말입니다. 이 때까지는 거짓 예배, 그릇된 예배가 많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드리는 예배, 사람의 변화가 없는 예배, 이런 예배는 불합리한 예배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진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생활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중요한 산 제사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화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 이것입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절)

그런데 변화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과연 개혁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세대를 본받는 나의 모습입니다. 이 세속적 방식을 이제는 개혁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면 변화는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 달성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어법상으로 수동태입니다. 이렇게 변화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내가 해야할 일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한 혁명가가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내가 중년에 이르러 내 인생의 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때, 나는 나의 기도 내용을 바꾸었다네. '주여, 저에게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지금은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제가 우선 만족해야 되겠나이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부터 나의 우둔함을 눈치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주여, 저에게 저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일세. 내가 처음부터 진작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허송하지 않았을거야."
모든 이가 환경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누구나 세상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아직도 변화를 달성하지 못한 분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계기를 잘 잡는 것입니다. 결혼의 시기, 퇴원하는 시기, 입학하는 시기, 제대하는 시기, 입사하는 시기, 새해, 이렇게 계기를 잘 잡아야 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1900년대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위대한 부흥사였습니다. 본래 그는 깡패였지요. 그가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지 사람들이 장에 갈때 제발 김익두와 마주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빌 정도였답니다. 그러던 그가 신앙을 가진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았는데 며칠 후 살아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사람들이 묻자 김익두는 말했습니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저는 주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참 결심이 대단합니다. 부고장을 써서 보내는 날로부터 새 생활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무우 자르듯이 자르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이 계기를 못 잡으면 어제의 부패된 내가 연속될 뿐입니다. 이제 이런 특별한 계기의 시점에 선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선은 지난 날의 나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2절)

우선은 내가 그 동안 이 세대를 본받고 살아온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기업에서 몇 해전 마누라와 아이들을 빼고는 다 바꾸라고 했습니다. 그런 기업에서 이제는 사람들을 갈아치우기 시작합니다. 기업 구조조정이란 명목 아래 사람을 갈아치웁니다. 변화하라고 말하지만 다 영업적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 방식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의 전환입니다. 제가 일전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하도 멋있어서 샀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경영학적 방식입니다. 그러나 제목만큼은 아주 멋있습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우리는 얼마나 익숙한 것에 길들여 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익숙한 것 중에서도 아주 작은 것부터 우리가 변화를 시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혁명에서 세계의 혁명과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큰 것과 승부하지 마세요. 작은 것에 승리하면 반드시 큰 것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작은 습관들을 정복하면 인격이 변합니다. 지난 한 해 정복하지 못한 작은 습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기도하는 일, 하루 10분도 못냅니다. 성경말씀 보는 일 하루 5분도 못냅니다. 생활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주일 15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넉넉하게 드리는 주일 아침 예배가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항상 그 15분 때문에 쫒겨서 허겁지겁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유혹에 약합니까? 백전 백패합니다. 완전히 세속적 방식에 굴복당하고 맙니다. 작은 유혹에도 습관적으로 넘어 갑니다, 무의식적으로 넘어 갑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 성장과 훈련’ 에 보면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독되어 있다면 이미 지배당한 것입니다. 내가 부릴 수 없다면 이미 노예입니다. 그것이 커피든, 텔레비젼이든, 쇼핑이든, 잠이든, 신문이든... 잘못된 습관에 도전해야 합니다. 거룩한 습관을 정착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평생 동안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거룩은 평생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거룩은 평생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일치시키는 사람입니다. 이 치열한 노력을 우리는 믿음의 생활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룩한 습관을 정착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신앙 입문을 하려는 분들에게 일주일에 한 시간만 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단지 한 시간입니다. 148 시간중에 단지 한 시간입니다. 새벽 4시부터 밤 1시까지 저는 시간이 무진장으로 있으니까 단지 한 시간만 내어 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시간과의 싸움으로부터 신앙 생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일주일에 한 시간만 내어도 생활이 급속도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거룩한 습관이 정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만제씨의 '막쪄낸 찐빵'이란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나서 100일 동안의 생활을 이야기로 쓴 것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석 달 열흘 동안에 사람이 아주 엄청나게 변화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되니까, 생활의 변화가 막 일어 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멈춘 분들,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변화의 멈춤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 변화가 느립니다. 이것은 크게 각성해야 할 일입니다. 변화의 심도가 더 깊어져야 능력있는 그리스도입니다. 변화하지 못하면 타락한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 변화를 멈추면 위선자가 됩니다. 장로나 집사가 그 변화를 멈추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바리세인이 달라 바리세인입니까? 변화를 멈추어서 바리세인이요, 서기관입니다. 세리 삭개오도 변하고, 음행한 여인도 변하고, 창녀도 변하고, 탕자도 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바리세인이요, 서기관입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남보고 변하라고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목사요, 장로요, 집사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그리스도인들이 변하지 않으면 가룟유다가 됩니다. 수 없이 예수를 따라 다니지만 수 없이 많은 교훈을 들었지만 자신을 제외시키면 예수를 팔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은 2000년 12월 31일입니다. 마지막 날이자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 낡은 나의 모습을 털어 버리는 시간입니다. 그 간의 죄책과 오류 시행착오와 뼈아픈 과오는 털어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찾아가는 멋있는 항해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2001년 새해에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내적 삶이 변하고 우리의 만남과 환경까지 변하는 큰 기쁨의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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