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4
시냇가 푸른 나무 (2001. 1. 7 주일설교)

시냇가 푸른 나무

오늘의 말씀/ 시1:1-6


"(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너나 없이 복을 원합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인 것처럼 그렇게 행복을 좇아 다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합격의 행복, 결혼의 행복, 취직의 행복, 자식 출산의 행복, 주식 폭등의 행복, 복권 당첨의 행복... 뭐든지 행복이란 행복은 다 만들어 내며 쫓아 다닙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그리 오래 가든가요? 이내 시들해 집니다. 다 순간적인 행복이요, 지나가는 행복입니다. 이것은 행복의 열매일 뿐입니다. 행복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런 행복을 열매 맺게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 인간의 오래된 숙제입니다.

사람들은 화분에 꽃이 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꽃을 지속적으로 피게 하고 오래 피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화분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행사 때 받은 난 화분은 성장 촉진제도 놓고 영양제도 급속하게 투여해서 억지로 피워 놓은 꽃입니다. 그래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시 피게 하려면 여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저 박제된 꽂처럼 그렇습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박제된 행복, 전시용 행복, 성장 촉진된 행복, 행사용 행복, 일회용 행복... 전부 이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행복을 오래도록 푸르고 푸르게 가꿀 수 있을까요? 철따라 꽃이 피도록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오늘은 2001년 첫 주일입니다. 올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멋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름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싱싱하게 푸르게 생기 넘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이요,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 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오늘 성경에 있습니다. 시편 1편이 바로 인간 행복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 천년 동안 내려온 인류의 성공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복있는 사람은 ... ” 행복한 사람의 정의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행복한 사람의 정의와 비슷합니다. 산상수훈도 그렇고 오늘 시편 기자의 복의 개념도 그렇고 좀 독특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원칙에 따르자면 행복한 사람의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악을 거부하는 생활입니다.
과거의 어둠의 생활, 과거의 불의한 생활, 과거의 어지러운 생활, 이것을 다 청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릇을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활동을 오늘 시편 1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모든 악의 처음은 귀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도 귀로부터 타락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와서 속삭입니다. 거기서부터 타락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멸망의 싹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불의한 자의 길(path)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타락할 때 한 번 걸어 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정녕 죽으리라’가 ‘죽을까 하노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악과를 가까이서 구경하는 길로 나섭니다. 그 동안에는 동산 중앙에 있었어도 가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까이 갔습니다. 따먹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마지막은 오만한 자의 자리(seat)입니다. 한 번의 범죄가 어렵지 그 다음은 아주 쉽습니다. 습관화됩니다. 고착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속이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그전에는 전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자식대에는 살인까지 합니다. 완전히 악의 습관이 정착되었습니다.

‘꾀’는 생각입니다. 계획입니다. ‘길’은 자신의 생활 방식입니다. ‘자리’는 자신의 습관화된 위치입니다. 이미 고정된 위치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 가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변해야 진정한 행복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은 우리가 새해에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꿉시다. 계획을 바꿉시다. 아예 생각 단계에서부터 신선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도록 합시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양은 ‘포즈’입니다. 포즈라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조차도 상상조차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은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 다음은 생활 방식의 변화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악의 길은 아닌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과연 어떤 길인지 한 번 둘러보세요! 내가 지금 어떤 생활 방식에 둘러 쌓여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끝에야 생활 방식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어둠의 길에서 빛의 길로의 전환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마지막은 자리가 변해야 합니다. 둥지를 버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추구하는 바, 여러분의 고정된 위치가 어떤 것입니까? 악인의 꾀가 성공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처세술이 뛰어나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입니다. 헛똑똑이입니다. 망하는 길입니다. 뿌리없이 흔들리는 삶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소를 길러 봤습니다. 살진 소는 털에 윤기가 흐릅니다. 그러나 영양이 부족한 소는 털이 꺼칠꺼칠합니다. 화초를 길러 본 분들은 압니다. 화초를 잘 기르면 아주 윤기가 납니다. 짙은 녹색에 검푸르거나 아주 윤기 있는 녹색이 됩니다. 그러나 화초를 잘못 키우면 누렇게 시들어갑니다. 아주 보기 싫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압니다. 지친 얼굴, 찌든 얼굴, 메마른 얼굴, 잠 못잔 얼굴, 불안한 얼굴, 절망스런 얼굴 ... 그 사람의 영혼은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메마르고 거친 영혼은 얼굴이 그렇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말씀 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악의 생활을 떠나는 소극적인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씀 속에 풍성히 거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릇을 깨끗게 했으면 그 다음에는 좋은 것을 담아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 즉 그때의 성경입니다. 언제나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람, 의식에서나 무의식에서나 말씀이 철칙처럼 지배하는 사람의 생활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까닭에 새해에는 말씀을 가까이에 배치하십시오! 말씀을 이미지화 하십시오! 가령 포르노 그림의 달력을 걸어 놓으면 마음이 쾌락으로 흐릅니다. 그러나 말씀의 달력을 걸어 놓으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리차드 포스터는 그의 책 ‘기도’에서 쉬지 않는 기도를 위해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도 제목이나 성구를 사무실 책상, 주방기구, 냉장고, 자동차, 핸드폰, 지갑 등 자신이 가장 많이 자주 접촉하는 곳에 배치하라고요. 이것이 쉬지 않는 기도를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법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내 생활 가장 가까이에 배치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앞으로 설교말씀은 다섯 번 반복하기를 원합니다. 주일 말씀듣기, 들으면서 메모하기, 주보 설교문 읽기, 설교 테이프 듣기, 각 성경 공부 시간에 나누기. 이렇게 자주 반복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쨋든, 우선 여러분의 인격이 변하기 전에 어려분의 주위 환경이 먼저 변한다는 사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사람을 살기 전에 여러분 주위가 먼저 진리의 환경으로 변한다는 사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이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이익을 남기는 생활입니다.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좋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내가 형통해 지고 내가 더 풍요로와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행복한 자의 열매는 기쁨과 형통이라고 했습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고,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삶입니까? 철철이 과실을 맺습니다. 상하의 계절입니다. 언제나 푸르러요. 마르거나 잎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생활입니다.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입니다. 그 다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 했습니다, 하는 일이 모두 다 형통한 것입니다. 하는 일이 다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축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사람은 끝난 것 아닙니까?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수사가 필요 없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150편의 첫 서두입니다. 그 첫 서두에서 하나님은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사는 생활입니다. 첫 서두의 권면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총론입니다.

새해의 첫 시작입니다. 새해 첫 서두에서 우리 주님이 권면하시는 말씀 깊이 새깁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고 싱싱한 행복을 주렁 주렁 맺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푸르고 푸른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진리의 길을 가게 하소서. 형통하게 하소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소서.
(200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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