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9
오뚜기 신앙 (2001. 1. 21 주일설교)

오뚜기 신앙

[사40:27-31]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 듣지 못하였느냐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사람은 바이오 리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체 주기이지요. 바이오리듬에는 지성, 감성, 신체적 지수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 지수가 높은 날은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면 됩니다. 감성 지수만 높으면 가급적 머리는 적게 쓰고 기분으로 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만약 신체 지수만 높으면 몸으로 때우는 일만 하면 됩니다. 다 높으면 무슨 일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 낮은 날이면 어떻게 합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사고가 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서가 안정된 균형적인 사람은 이런 높낮이를 잘 통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억지로 파도를 거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도를 탑니다. 이런 사람을 인격이 완성된 사람,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위대한 신앙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책망 받는 처지로 곤두박질 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물위로 걸어가는 놀라운 믿음을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침몰해서 허우적거립니다. 때로는 귀신도 제압하는 활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가도 때로는 계집종의 말 한마디에 예수를 저주하는 약한 믿음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바이오리듬입니다. 그러면 이 괴로운 신앙 부침(浮沈)의 고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40장은 이사야서의 분수령입니다.
이 때 까지가 심판의 메시지였다면 40장부터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때까지가 절망의 메시지였다면 이제부터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2절)

사실 회복은 먼저 죄 사함에서부터 옵니다. 모든 회복은 죄 사함이 출발입니다. 죄 사함이 없이는 회복이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회복을 열망하는 자들은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때문에 통회하고 마음을 찢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회복이 옵니까?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11절) 품에 안으시는 선한 목자의 인도가 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한 목자 상이 자주 나옵니다. 그렇지만 죄악 된 백성에게는 염병을 내리시고, 몰살하는 죽음을 내리시고, 이방 백성의 칼 아래 능욕을 당하게 하는 진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때의 하나님은 불을 품는 진노의 화신 같아 보입니다. 죄악과 반역에 빠진 아들 딸 들에게 내리는 징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징계의 끝에는 언제나 희망과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죄를 참회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선한 목자로서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이사야가 전하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바벨론 포로 생활의 해방입니다. 더 이상은 나라 없는 슬픔, 이국에의 포로생활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침공,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 바벨론의 침공,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 그래서 기다림도 길었고 투쟁도 길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시기였습니다. 들려오는 메시지라고는 심판과 진노의 메시지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의 멧세지가 들려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무 많이 지쳐 있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 오라” “여호와를 앙망하라”입니다.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30-31절)

소년은 누구입니까? 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피곤을 모릅니다. 누워있는 어린아이 하는 행동을 어른들이 한 번 따라해 보세요. 3분도 안돼서 녹초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활동력이 많습니다. 그만큼 피곤을 모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망아지처럼 뛰는 것 봤지요? 어른들이 매일 놀이터에서 이 아이들 따라 같이 한 번 해 보세요. 하루하고는 몸져누울 것입니다. 그런 피곤을 모르고 활동력이 왕성한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해 진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악조건입니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지요.

장정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원래 장정이라고 표현한 ‘바후림’은 위험한 일을 위해 선발된 자들을 말합니다. 요즈음 같으면 특수임무를 띤 특공대쯤입니다. 아주 강하게 단련된 자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철인처럼 버티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수 요원들도 넘어지고 자빠질 정도로 극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원망을 합니다. 내 사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내 원통함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27절) 그러나 이런 원망도 따지고 보면 여호와 앙망이 사라진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세 가지를 공급받는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새 힘을 얻습니다.
문자적인 뜻은 힘이 새 것으로 바뀌어 진다는 말입니다. 바뀌어 진다는 동사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뜻의 말입니다. 옷을 갈아입듯이 새 힘으로 갈아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힘은 힘인데 새 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힘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힘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힘입니다. 성령이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우리는 이 새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힘, 주께서 주시는 신선한 새 힘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은 또 오늘의 새 힘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이런 새 힘을 늘 신선하게 공급받는 데는 왕도가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함으로써만 얻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31절)

‘앙망하다’를 영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기다린다”(wait for the LOR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관심의 방향이 여호와에게로 집중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눈을 들어서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우리 삶의 초점을 주님께로, 여기서 새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여호와 앙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 이것이 바로 여호와 앙망입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바랍니다. 성품을 다해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 주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앙망이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회복이 있고, 여기에서 새 힘이 용솟음 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레크리에이션입니다.(re-creation)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이렇게 여호와를 앙망하면 희망이 솟습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라도 여화와를 앙망하면 돌파구가 생깁니다. 몸도 마음도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여화와를 앙망하면 기거서 회복과 활력이 솟아 나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런 믿음을 현실화하시는 하루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피곤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피곤함을 느낍니까? 사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와 제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난 뒤, 제자들은 정말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는 극도로 심신이 피곤한 무기력증에 걸려 있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그랬습니다. 직업적인 어부들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진 것입니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할 의욕도 없어 진 것입니다. 이 피곤함이 인생을 절망에 빠트립니다.

의욕 상실증이지요. 신앙에서도 열정과 의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앙의 바로미터는 의욕과 열정입니다. 일반적으로 건강도 그렇습니다. 자주 피로함을 느끼고 무기력증에 빠지면 대개의 경우 이미 병이 깊숙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의욕이 사라지고 자주 피곤함을 느낀다면 영적 적신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피곤함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든 걸어가든 피곤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피곤함을 모르면 더 신앙의 바이오 리듬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바로 믿음의 거장들입니다. 이런 신앙의 에너지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독수리 날개 침 같이 상승의 활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독수리의 힘찬 날갯짓처럼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락하는 삶을 얼마나 자주 살게 되는 지요? 지금 추락하고 있는 분들은 이런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독수리가 되었다가 내일은 솜털이 달린 아기새가 되는 순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일평생 동안의 신앙 여정을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고 달려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앞으로 믿음의 길을 무기력하거나 추락하지 않고 힘찬 상승의 날개짓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소년이라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힘찬 비상의 날갯짓을 변치 않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호와 앙망입니다. 다른 출구는 없습니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자빠지는 악조건 속이라도 오히려 독수리의 비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호와 앙망의 결과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달음질 쳐도 피곤하지 않는 활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짓은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운지요? 바람이 거세게 불면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상승합니다. 거센 바람도 이용하는 겁니다.

새로운 힘을 충만히 얻고 모든 사람이 거꾸러지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찬양을 쏟아내는 환희의 독수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활력이 넘치는 비상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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