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9
복의 근원이 되라! (2001. 1. 28 주일설교)

복의 근원이 되라!

[창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


미국의 한 신문사가 현대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후 현대인중엔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연락해 달라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하루 일을 잘 끝낸 행복, 예쁜 꽃을 보는 행복, 아침에 새소리를 듣는 행복,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행복 등등... 무려 5만여 가지나 수집된 행복의 사례는 대부분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습니다.

정말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에 대한 정의도 많고 행복 추구에 대한 방법도 많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을 가꾸고 누리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같은 복을 안고서도 볼행해 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기독교에 있어서 복이란 무엇일까요? 성서적 축복의 개념은 또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서의 모든 축복은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퍼부어 준 것이 아닙니다. 좌우지간 이름을 창대케 하고 좌우지간 복의 근원을 삼아 주시는 게 아닙니다. 2절의 축복은 1절의 전제가 충족되어야 이뤄지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절)

떠나라! 가라!의 명령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축복의 선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이 말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분좋은 축복의 말씀에도 반드시 전제가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구하며..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욥8:5-6) 하나님 말씀을 구하고 정직하고 청결해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의 그 엄청난 축복도 다 전제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신28:1) 이것이 전제입니다.

까닭에 기독교의 복,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서적인 축복은 다 그 전제가 있습니다. 무조건 복, 좌우지간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성서의 모든 축복은 자신이 풍성해 지고 남을 풍성케 하는 복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복을 기피하거나 복을 꺼림직 한 것으로 묘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복을 주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못 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축복을 베푸는 것이 왜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나요?
한국 교회 하면 제일 먼저 기복주의를 떠올립니다. 복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복을 가지고 협박을 하고 복을 가지고 거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 사람들이 보기에 복을 받는 다는 것이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복입니다. 한 발걸음 더 나가면 남들을 착취하는 복입니다.

그리스도인 기업가가 노동자를 착취해서 자기만의 축복을 성취합니다. 다른 사람을 손해 보이면서 내가 복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망입니다. 필경 남들을 희생 시켜야만 내가 복을 얻고 성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남의 피눈물 위에 설립된 나의 축복, 나의 성공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성취한 복을 나누지 않는 다는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복은 나누는 것입니다. 건강, 재산, 시간, 재능, 학식, 가정, 집안, 복음, 그 어느 것도 나누지 않으면 복의 원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아주 큰 선언을 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절)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2절) 그렇습니다. 성서적인 복은 복의 근원(발원지)로서의 복, ’끼쳐주는 복‘입니다.

여러분 전도, 전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바로 내가 받은 복을 나누는 게 바로 전도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졌다면,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 졌다면, 그것을 나눠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내가 생명 얻고 행복 얻고 진리 얻고 영생 얻고 나만 누리고 잘살자! 이거 지독한 이기주의 아닙니까? 이거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직무 유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복은, 복의 탱크나 저수지가 아닙니다. 근원으로서의 복입니다. 복의 발원지입니다. 근원, 발원의 복이요, ‘인하여’의 복입니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 (2-3절)

모든 족속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는 것입니다. 가정이, 직장 동료가, 이웃집 사람이, 나와 만나는 인간관계가 복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 복입니다. 정말 우리는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복의 증거는 나로 인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전해 주었더니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더라! 이거 아주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나로 인해 재정적으로 재기했더라. 절망에서 희망의 삶을 살게 되더라. 나로 인해 용기를 갖게 되더라. 나로 인해 올바른 길을 가게 되더라. 나로 인해 건강의 도움을 얻게 되더라. 나로 인해 그 집에 평화가 찾아오더라. 우리 집으로 인해 그 집의 부부 사이가 예전과 다르게 많이 좋아 졌더라. 이것은 전부 땅의 모든 족속이 나로 인하여 복을 얻는 ‘인하여’의 축복을 누리는 행위입니다.

반대로 나로 인해 실족하게 되더라. 나로 인해 절대로 예수 안 믿는 다고 하더라. 전부 저주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 많습니다. 자신은 축복을 받았는데 저수지로 가두어 놓다가 저주의 샘이 되신 분들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은 많이 받았는데, 가두어 놓다가 스쿠르지 영감처럼 오명만 남깁니다. 재능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봉사하는데 쓰지 않고 자랑하고 뻐기고 뽐내는 데만 씁니다. 배움을 많이 받아서 지식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자신 한 몸 추스리고 먹고사는 데만 급급합니다. 못배운 사람 은근히 무시하고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만 씁니다. 이것 다 저주의 샘이 된 것입니다. 다 가두어 놓아서 그렇습니다.

복은 나누는 것에 있습니다. 복의 정당성은 나누는 것에 있습니다. 복은 나누면 나눌수록 자꾸 더 커집니다. 그리고 나누는 복만 하늘에 쌓이고 인생에 남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잘 봅니다만, 돈은 자기 수중에 있을 때만 자기의 것입니다. 그 때만의 축복입니다. 나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복이 내 곁에 있을 때 열심히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도가 나고 사업이 망해도 그 베푼 복은 하늘에 남고 내 인생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말에 ‘배워서 남주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부터 바꿔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워서 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돈벌어서 남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잘나서 남줄 수 잇어냐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재능이지요.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의 근원이 되자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 축복의 발원지, 복의 진앙지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축복이 진도 8의 강한 지진이 되어, 이웃을 적시고 일터를 적시고 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축복의 샘물을 흘려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 그 앞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1:3)
"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왕상17:16)

어떻게 하면 축복의 샘이 마르지 않을 수 있나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요, 둘째는 복의 나눔에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복을 아무리 많이 구해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크게 구해도 꺼리길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축복의 샘이 적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라는 연못처럼, 작은 샘이 지만 1300리의 땅을 적실 수 있고 그 강에 기대에 사는 수백만의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고 자꾸 복을 구합시다. 복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도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복의 오용이 문제입니다. 복의 남용이 문제입니다. 까닭에 우리는 복을 제대로 사용하고 큰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을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을 제대로 누리고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기쁘신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원칙대로 살아 큰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큰 축복을 받았으면 우선 여러분이 그 풍성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기억할 일은 그 받은 축복이 발원지가 되고, 진앙지가 되어 이웃에게로 흘려 보내고 퍼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물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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